강민혁이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자 혜원은 은수의 허리를 쿡 찔렀다. 하얗게 질려있는 은수는 얼음송장이 된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다가 혜원이가 허리를 쿡 누르자 그때서야 얼떨결에 강민혁한테 충성 하고 거수경례를 한다.
" 너 이동네 살아? 나도 이 동네로 이사 왔는데 나는 저쪽이 집이야. 강민혁은 지나가던 길가 쪽으로 검지 손가락을 세워 가리켰다."
은수는 강민혁이 친하게 지내자며 핸드폰 번호를 물어봤을 때 주저하다가 자기번호가 아닌 다른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러자 강민혁은 그 자리에서 은수가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거는 것이다. " 신호는 가는데 안 울리네? "
"핸드폰을 집에다 놓고 나와서....."
"알았어. 또 보자. 이 번호 저장한다" 라며 손을 흔들며 간다.
은수는 자신이 알려준 가짜 번호로 강민혁이 전화를 걸었을때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십시오"라는 멘트가 나올 줄 알았는데 천만다행으로 신호는 가고 전화를 안 받는 번호였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은수는 자신이 무슨 번호를 불러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은수는 강민혁이 시야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자 그때서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은수의 집에 다다랐을때 혜원은 옆집인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은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 내가 점심 사줬으니까 커피 한 잔 줄거지? " 라며 은수가 대문 키를 열자 은수집으로 뒤따라 들어가는 것이다.
은수의 눈치를 살피던 혜원은 은수가 끓인 커피잔을 내어줄 때 슬며시 말을 걸었다.
"아까 그 애 누구야? 왜 니번호 아닌 다른 번호 가르쳐줬어? 거수 경례 하는 거 보니까 군대 동기 같던데. 맞아?"
"커피 마셔" 은수는 대답을 회피했다. 은수는 혜원이한테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웬지 찌질해 보일까 두려웠다. 혜원은 은수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은수의 석연치 않은 태도에 뭔가 캐묻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혜원이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자 은수는 컴퓨터를 켰다. 게임속으로 들어갔다.
게임 속에 들어서면 은수는 자신감이 생긴다. 회사 다닐 때는 바빠서 게임할 시간도 없었는데 실직하고 나니 마음껏 게임을 할 수 있는 게 좋은 것 같기도 했다.
닉네임을 <에반>으로 치고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지난번에 말을 걸었던 닉네임이 눈에 띄였다.
<초록별의 제우스신>
은수는 예전의 몽구에서 에반으로 닉네임을 변경해서 초록별의 제우스신이 자신과 대화한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은수는 게임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괜스레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 것도 귀찮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벨라라는 닉네임이 말을 걸어왔다. 25살 여자인데 희귀병을 앓고 있어서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은수는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줘야 할지 몰랐다.
고작 한다는 말이 벨라 라는 아름다운 닉네임을 지으셨네요.라고 말하자 벨라는 감사해요. 그래도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요. 비록 희귀병을 앓게 돼서 힘들게 살았지만 그래도 세상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요.
은수는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벨라에게 말했다. 군대에서 강민혁에게서 겪은 일과 회사에서 김대리에게서 겪은 일을 말했다. "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그 사람들을 죽여요.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나고 미워요. 가끔씩 그들을 죽이는 악몽도 꾸어요. 나는 바보로 태어난 걸까요? 왜 그들은 나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면박 주고 조롱하고 모욕을 주는지 모르겠어요" 은수가 벨라에게 묻자 벨라는 "김대리나 강민혁 같은 사람과 마음을 터놓고 대화해 본 적 있나요? "
"대화라고? 남의 인격을 무차별적으로 무시하는 악마 같은 개새끼들과 무슨 대화를 하라는 거지? "
은수는 흥분해서 욕이 튀어나왔다. 벨라는 에반이라는 닉네임의 남자가 얼마나 그들을 미워하고 있는지 얼마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았을지 짐작이 되었다. 벨라는 에반을 돕고 싶었다.
"에반 씨, 싸워야 할 때 싸울 줄 알아야 해요"
"싸워도 나는 그들을 이길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꾹꾹 참았어요. 뭔가 말하고 싶었는데 입가에서만 맴돌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나도 내가 바보 같아서 슬퍼요. 그런데 그들이 정말 미워요. 그들은 정말 나쁜 사람들이에요"
은수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분하다는 생각에 저절로 눈물이 고이는 것이다.
"에반 씨, 미안해요."
"내 본명은 은수예요. 정은수"
"은수 씨 미안해요. 그래도 이 말은 하고 싶어요. 내가 만약 당신처럼 건강한 몸을 갖고 있다면 나는 내가 싸움에 지더라도 나를 괴롭게 하는 그들과 싸울 것 같아요. 싸우다 죽더라도 싸울 것 같아요.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살게 되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과 같잖아요. 이만 저는 가봐야 해요. 이만 안녕"
벨라는 그렇게 가버렸다. 은수는 생각했다. '싸워서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가던지, 나는 지는 싸움을 하고 싶지도 않고 싸우는 것도 싫어하는데 어떻게 하냐고, '
은수는 벨라가 가버리자 잠시 멍하니 있다가 초록별의 제우스신과 대화해 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인터넷에서 살인범과 대화를 해도 결코 살인범은 자신을 해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하이, 초록별님!"
은수는 <초록별의 제우스신>에게 인사를 했다.
" 아. 씨바 너 누구야? 너 때문에 게임에서 졌잖아. 눈치도 없는 새끼가 아무 때나 말 시키고 지랄이야.
너 나 알아? 왜 말시키고 지랄인데. 어? "
" 그냥 인사만 한 거뿐인데 그렇게 화낼 필요 없잖아요."
은수는 게임 안에서는 기죽기 싫었다. 게임 안에서는 얼마든지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 말 시키는 것도 때가 있는 거야 좃만한 새끼야."
" 너도 지난번에 나한테 먼저 말 시켰잖아. 살인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이 새끼 너 누구야? 똑바로 말 안 해?"
" 몽구에서 에반으로 닉네임을 바꾸었어요."
" 닉을 왜 바꾸고 지랄이야. 지난번에 게임에서 나를 이긴 새끼구만. 게임 좀 잘해서 말 좀 시켜줬더니만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 제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정말 죽여주나요? "
" 돈 주면 당연히 죽여주지. 돈으로 안되는 거 있겠냐? 돈은 있어? "
" 아뇨. 실업자인데요."
"돈 없는 주제에 누구를 죽여달라고 운을 떼냐?"
"정말로 살인을 해 본 적 있나요? 아니면 농담으로 말한 건가요?"
" 내 닉네임을 봐. 나는 신이야. 너네들 목숨은 언제든지 내가 거두어 갈 수 있어.
사람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야."
"싸움도 잘하세요? "
"싸움을 왜 하냐? 죽이는 게 더 쉬운데? 날 건드리는 놈은 다 죽였는데. 너도 죽여줄까?"
" 아뇨. 저는 저를 괴롭혔던 놈들이 있어서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데 싸울 용기도 죽일 용기도 없어요.
" 병신 같은 놈, 어벙벙한 놈이랑 대화하는 시간이 아깝다. 꺼져라"
초록별의 제우스신이 은수를 조롱하듯 비웃자 갑자기 은수는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 네가 더 병신이야. 게임도 못하는 주제에 게임하러는 왜 오는 거냐?"
" 이 새끼가... 미쳤나. 너 뒈지고 싶어?"
" 너나 뒈져. 남을 무시하는 말하고 함부로 지껄이는 새끼들은 주둥이를 찢어서 다 죽여야 돼. 지구상에서 영원히 격리시켜야 된다고"
"너 거기 가만히 있어. 내가 죽이러 간다." <초록별 제우스신>은 로그아웃을 하고 사라졌다.
은수는 입가에서만 맴돌았던 욕이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고 급기야 살인이야기를 하는 놈과 자신이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예전에 게임할 때는 한 번도 누군가와 욕을 하면서 싸워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싸움을 해 본 것이다. 학교에서도 군대에서도 싸워 본 적이 없다.
싸워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봤지만 싸우면 꼭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 같고 왠지 싸우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늘 마음속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오늘 벨라가 한 말
" 싸워야 할 때 싸울 줄 알아야 해요"라는 말에 동요된 것일까. 아니면 게임 속이라서 싸우게 된 것일까 생각해 봤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속은 시원했다. 하지만 기분은 별로 유쾌하지는 않았다.
벨라는 정말 많이 아픈 것일까. 어디서 어떻게 아픈 것일까.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물어봤어야 했는데... 은수는 벨라와 다시 만나 더 많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벨라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졌다. 분명히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을 거야.
갑자기 외로운 감정이 밀려왔다. 죽는다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어쩌면 죽음이 제일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아프고 죽는 것만큼 두려운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진시황도 죽음이 두려워 불로초를 찾았을 것이다. 벨라가 정말로 죽는 것일까 은수는 오늘 벨라와 잠깐 대화했지만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때 밖에서 엄마와 아빠가 현관문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은수의 엄마와 아빠는 식당을 운영하신다.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서야 들어오신다.
엄마는 들어오시자마자 은수의 방문을 열었다.
"아들, 저녁 아직 안 먹었지? 얼른 밥 해 줄게 조금만 기다려"
"배고프지 않아요."
"은수 방에 있으면 나와봐라." 은수 아빠는 은수를 불렀다.
"은수야 아빠가 부르신다. 얼른 나와"
은수는 내키지 않았지만 거실로 천천히 걸어갔다.
" 너 이제 어쩔 셈이냐? 직장은 왜 관뒀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디 말 좀 해봐"
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 너 인마, 아빠가 묻잖아. 말을 헤야지 답답하잖아"
" 제 일에 신경 쓰시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당분간 쉴 거예요."
"쉴 거면 식당에 나와서 알바라도 해라. 엄마 아빠 일도 좀 도와주고 일도 배우면 나쁠 것 없잖니"
" 싫어요. 당분간 아무 일도 하기 싫어요. 그냥 쉬고 싶어요."
은수 아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마음에 썩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 그럼 회사는 왜 그만뒀는지 말해 줄 수 있니?"
"같이 일하는 사람하고 마음이 맞지 않아서 그만뒀어요."
" 너 그 회사 취직됐다고 엄청 좋아했잖니? 그런데 회사 사람이랑 마음이 안 맞는다고 그렇게 쉽게 그만둬? 사회생활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여보 그만하세요. 은수가 다 알아서 한다잖아요"
" 당신이 아들 역성만 드니까 아들이 저렇게 약해빠졌잖아"
"식당에 와서 힘든 일도 하고 그래야 사람이 된다고. 엄마 아빠가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버는지 봐야 될 거 아냐?"
" 난 우리 아들 식당 일 안 시킬 거예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살게 하고 싶어요."
" 저 애가 좋아하는 게 뭔데? 컴퓨터? 게임? 세상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사는 사람이 어딨어. 필요하면 하기 싫은 일도 하고 뭐든지 해보는 게 좋은 거지"
은수 엄마와 아빠는 은수가 어릴 때부터 자주 다투었다. 엄마 성격도 강하고 아빠 성격도 강해서 서로 다투면 지려고 하지 않았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은수는 늘 엄마와 아빠가 다투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 어쩌면 은수가 싸움을 싫어하게 된 이유도 다투는 엄마 아빠 밑에서 자란 이유일지도 모른다. 서로 너무나 다른 것 같은 두 사람이 평생 싸우면서도 헤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서로 자기주장이 강해서 절대로 지려고 하지 않았다. 은수는 기가 눌려서 살았다. 부모가 극과 극을 달리며 싸울 때 은수는 늘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
은수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은수는 영원히 방에서 나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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